From 우리집 홈닥터 비타민 C
비타민 C 이야기가 나오면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라이너스 폴링입니다. 라이너스 폴링이 어떤 일을 했던 사람이었는지 그가 이룩한 일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폴링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폴링은 비타민 C 운동의 대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래 화학을 전공한 과학자였습니다. 심한 빈혈과 합병증을 불러오는 겸상적혈구증의
실체를 밝히고 변형 단백질의 구조를 알아내는 등 현대 화학의 한 축을 끌어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화학 분야에서 이룩한 업적으로 폴링은 노벨 화학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폴링은 사람의 유전자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DNA 구조 규명에도 뛰어들었고 DNA가 세포의 핵 속에서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있나를 탐구해 나가면서 자신의 생각과 실험 자료들을 세상에 알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폴링이 DNA 구조 연구를 진행해 가던 즈음에 폴링은 미국 정부로부터 출국금지 조치를 당하고 여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 이유는 폴링이 반전운동을 주도하는 사회운동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폴링은 해외학회를 드나들 수 없게 되었고 학계와 실험실로부터도 한발짝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DNA 구조는 결국 연구를 지속해간 와트슨과 크릭에 의해 규명되었습니다.
폴링의 자료들이 와트슨과 크릭의 DNA 발견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세상이 인정하고 있고 크릭 역시 자신들이 DNA 구조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폴링의 도움이 컸다고 얘기했습니다. 만약 폴링이 자유롭게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면 DNA 구조 발견은 폴링이 먼저 이루어내었을 것이며 폴링은 또 한번의 노벨상을 수상했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폴링은 시대의 석학이었습니다.
폴링은 아인슈타인에 견주어지기도 했을만큼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미정부에 폴링의 해금을 요구하기도 했었습니다. 폴링이 펼쳤던 강한 반전반핵 운동은 훗날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의 반전반핵 운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일본이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하던 무렵이었습니다. 그 시절 폴링의 집에는 일본인이 정원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이 있은 후 미정부는 일본일들을 격리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폴링의 집에서 일하는 정원사도 수용소로 가야했습니다.
폴링은 미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집 앞에 붉은 글씨로 “미국인들이 사망했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인들을 사랑한다.”는 글을 내걸면서 일본인 집단 격리 수용을 반대했고 반전반핵 사회운동을 펼쳐나갔습니다.
폴링은 노벨상을 공동 수상이 아닌 단독 수상으로 두 번을 받았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비타민 C 운동을 강하게 펼쳐나갔던 것은 자신의 비타민 C 체험과 음지에 버려져 있던 비타민 C 연구 기록들을 발굴해 나가면서 비타민 C에 난치병들을 치유해 낼 희망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되면서부터였습니다.
비타민 C와 감기라는 책을 시작으로 펼쳐간 그의 비타민 C 보급 운동은 기존 의학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가면서 그가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던 1994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폴링은 투병 하던 침대의 머리 맡에서 전화를 통해 비타민 C 연구를 진두 지휘해 나갔습니다.
비타민 C의 치유력을 받아들이지 않는 의학계와 전쟁을 마다 않고 숱한 조소와 비난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비타민 C의 참모습을 알리려 했던 사람이 바로 라이너스 폴링입니다. 이제 그는 노벨상 수상자라는 이름 보다는 비타민 C 운동의 아버지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훗날 그의 논리가 기존 의학에 받아들여져 비타민 C가 치료의학으로 자리매김 되는 날 그의 이름은 다시 한 번 세상에 울려퍼질 것입니다.